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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형은 대도가 아닌 잡범Sweet Day/삶의 향기 2013. 4. 15. 11:13반응형
조세형을 '大盜'로 부른 건 시대가 만든 허상… 처음부터 잡범이었다
당시 경찰·법조인·일선 기자…그들이 알고있는 大盜의 진실
조선일보 곽창렬 기자 입력 2013.04.15 10:41
지난 3일 '대도(大盜·큰 도둑)'란 별명을 달고 다니던 조세형(趙世衡·75)이 어설픈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혔다. 그를 신고한 한 주민은 "온 동네가 다 들리게 유리를 깨는 행동이 하도 어설퍼서 112에 신고하는 순간까지 집주인인지 좀도둑인지 헷갈릴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매스컴은 '좀도둑으로 전락한 대도' '대도무상(大盜無常)'이란 제목을 달았다. 지금은 추락했지만 '왕년엔 대도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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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그랬을까?
그에 관한 과거 신문기사와 판결문을 토대로 생애 첫 도둑질 때 조세형을 검거한 뒤 후견인 역할을 한 경찰, 검거된 조세형을 적극 옹호한 법조인, 1982년 당시 '조세형 사건'을 보도한 기자들에게 진실이 무엇인지 물었다.
①조세형은 정말 부유·권력층만 털었나?
조세형은 14세에 도둑질을 하다가 처음 붙잡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후 수십 차례 빈집과 금은보석방을 털었다.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조세형은 36세이던 1974년 5월 15일 오후 8시쯤 서울 신당동의 한 평범한 가정집에 침입해 녹음기 한 대 등 모두 5만4100원 상당을 훔쳤다. 1975년 1월 31일에는 서울 중구 필동 한 가정집에 들어가 다이아 반지 등 105만원의 상당을 훔치기도 했다.
언론이 그를 처음 보도한 것은 1975년쯤이다. 2월 27일자 경향신문은 '망원경 탐지 도둑질'이란 기사에서 "(그가) 서울 명륜동 양모씨 집 창문을 뜯고 들어가 금고를 드라이버로 부수고 현금·수표·금·비취목걸이·다이아몬드 반지 등 2600만원어치를 훔쳐 내연녀를 통해 700만원을 받고 팔아넘겼다"고 보도했다.
조세형이 언론에 다시 등장한 것은 7년 복역을 마친 직후였다. 1982년 11월 27일자 동아일보는 "경찰이 '장안의 큰손'으로 알려진 조세형을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는데, 조씨는 자신의 전과가 알려질까 두려워 가짜 신분증을 가지고 다녔다"고 보도했다.
조세형이 '대도'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이 무렵부터였다. 1982년 12월 15일 한 일간지는 "서울 형사들은 그를 '대도'라고 부른다" "유명 인사의 집만 골라 값비싼 귀중품을 털어온 그는 간 큰 도둑" "돈을 쓰는 데도 손이 커서 한 달에 1000만원까지 뿌리기도 했다는 게 주변의 얘기"라고 전했다.
그가 결정적으로 '대도' 훈장을 단 것은 1983년 훔친 5캐럿짜리 물방울 다이아몬드의 주인이 5공 시절의 고위층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뒤였다. 정부를 공격할 거리를 찾던 야당이 들고일어나자, '5공'에 반감을 갖고 있던 대중이 그를 '강자(强者)를 노리는 대도'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훗날 그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물방울 다이아몬드를 훔친 집이 전 청와대 경호처장의 집"이라고 주장해 자신의 '대도다움'을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중락 전 총경은 "조세형은 다른 잡범들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14세 소년 절도범이었던 조세형을 검거한 인연으로 장기간 후견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최 전 총경은 "큰 집에 들어가다보니 고관대작의 집에 들어가게 된 것이지, 알고 들어간 게 아니다"라며 "의로운 사람을 도우려고 했던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조세형을 취재한 현직 언론인은 "1983년 조씨가 탈옥했다 검거될 당시 톱과 드라이버로 저항했는데, 이는 대도라는 말과는 먼 게 아니냐"고 말했다. 당시 재판 대기 중에 탈주한 조세형은 무고한 18세 대학생을 인질 삼아 대항하다가 경찰이 쏜 권총 두 발을 맞고 검거됐다.
②조세형은 정말 신출귀몰했나?
1970년대 조세형의 범행을 기록한 판결문을 보면 '조씨는 뒷담을 넘고 베란다를 통해 2층 방에 침입했다'" '뒷담을 넘고 그 집 안방 쇠창살을 드라이버로 뜯어냈다'고 기술했다. 조세형의 절도 기술이 '홍길동' 수준으로 격상된 것은 1983년 한 일간지의 보도 이후였다. "조세형은 드라이버 하나로 부호집 안방 장롱에 든 귀금속을 제 것처럼 꺼내쓰는 '도술(盜術)'을 부렸다."
당시는 보안 시스템이 없던 시절이었다. CCTV도, 사설 경비업체도 없었다. 특히 1975년 '망원경 탐지 도둑질' 시절부터 조세형은 사람과 마주치는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대낮 빈집을 노리는 경우가 많았다. 1982년 동아일보는 그가 큰 집을 노린 이유에 대해 "큰집이 의외로 문단속이 허술한 경우가 많고, 집이 크면 한쪽 방에서 웬만한 소리를 내도 발각되는 일이 드물고, 큰집일수록 낮에 비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분석했다.
최중락 전 총경은 "조세형의 도둑 수법이 대범하거나 그런 게 없었다. 평범한 다른 도둑들과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그를 옹호했던 법조계 인사도 "도둑질을 직업으로 삼았던 인물이라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대단해 보일 수 있지만, 다른 전문털이범들도 조씨 정도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조세형이 다른 도둑보다 우월했던 것은 체력이라고 말했다. 드라이버 하나로 창살을 뜯어내고 금고를 부순 것은 신출귀몰한 '기술'이 아니라 우직한 '힘'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나이 먹고 힘이 떨어지고 나서 도둑질을 할 때마다 붙잡히는 것은 애당초 그에게 도술(盜術)이 없었다는 게 아니겠냐"고 말했다.
③조세형은 정말로 훔친 돈을 기부했나?
1983년 4월 14일 한 일간지는 이렇게 보도했다. "조세형은 변호사에게 '경찰은 내가 훔친 돈을 유흥에만 쓴 것으로 묘사했지만, 나는 아침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서울역 지하도 등에서 잠을 자는 걸인들에게 돈을 골고루 나눠줬다'고 말했다."
이런 그의 발언은 언론을 통해 대중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여론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당시 이해구(李海龜) 치안본부장이 "조세형은 훔친 돈으로 불우한 이웃을 도와준 적은 없다. 술집 등에서 호스티스들에게 돈을 마구 뿌려 횡재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발표했지만 대중들은 믿지 않았다.
그런데 조세형은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얼마만큼 나눠줬는지는 구체적으로 진술한 적이 거의 없다. 최중락 전 총경은 "나눠주길 뭘 나눠주나. 자기 먹기도 바쁜데. 내가 보기에는 없었다. 만날 붙들리면 그렇게 얘기했다. 자기 미화하려고…"라고 말했다. 그를 옹호했던 법조인도 "그가 일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줬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정상참작을 받기 위한 목적이 컸다"며 "'저 도둑질을 했지만 베풀어 주고 싶었습니다'고 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조세형의 전력도 기부 행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도둑질을 하면 여성과 함께 호화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1982년 검거 직전엔 부자들만 가입할 수 있는 사파리 클럽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Sweet Day > 삶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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