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3.30 03:03 | 수정 : 2013.03.31 06:53
감혜림 기자의 '판결문으로 본 세상' (1)
'주말부부' 주부 노려
목소리 변조 SW 얻어다 발신번호 숨기고 전화… "너로 인해 행복하다" 꾀어
왜 당했나
情에 굶주리는 등 심리적 약점 파고 들면 일반인도 쉽게 말려들어
대법원은 지난 14일 1인 4역을 하면서 4년간 한 여성을 성 노예로 삼은 목사에게 징역 13년형을 확정했다.
정모(39)씨는 신학대와 대학원을 나와 2008년부터 대구 지역의 교회에서 전도사와 부목사로 일했다. 전도사로 일하던 2008년 4월 그는 교회 신도인 30대 여성에게 접근했다. 주말부부로 6·7세 연년생 남매를 둔 주부였다.
전도사 정씨는 통신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소리 변형 프로그램'을 얻어 목소리를 변조했다. 그러곤 발신 번호를 숨기고 여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을 은행원 '이상훈'이라고 소개한 뒤 "당신을 잘 알고 있다"고 말을 걸었다. 여성 신도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자신의 정보를 상세하게 말하는 그를 옛 지인이라고 믿었다. 정씨는 "오늘도 너로 인해 행복하다. 너로 인해 숨을 쉬고 하루를 산다"는 말로 여성의 호감을 얻었다.
가상 인물인 '이상훈'은 3개월 뒤 "태국으로 파견 간다"며 여성에게 "당신이 보고 싶을 때마다 볼 수 있도록 나체사진과 자위하는 동영상을 보내달라"고 했다. 이후에도 태국에 있는 척하면서 "사랑한다"는 이메일을 보냈다. 남편과 떨어져 지내 외로웠던 여성은 전화로만 대화를 나눈 '이상훈'에게 연애 감정을 느껴 그의 요구를 들어줬다.
얼마 후 '이상훈'은 여성에게 "부하 직원이 공금을 횡령했는데 은행 부행장이 교회 장로라 전도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정 전도사를 찾아가 원하는 대로 해줘라"고 했다. 정 전도사는 정씨 자신이었다. 여성은 '이상훈을 돕겠다'는 생각에 전도사와 성관계를 했다. 2009년 "나(이상훈) 때문에 정 전도사가 재판하는 데 700만~800만원이 들어 힘들어하니 돈을 구해달라"며 거짓말을 해 730만원을 뜯어내기도 했다.
다음 해 정씨는 다시 목소리를 변조해 같은 여성에게 "이상훈의 직장 상사인 서 부장"이라며 전화를 걸었다. '서 부장'은 "태국에서 이상훈이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됐는데 당신의 동영상에만 반응한다"며 "이상훈을 살리려면 사진을 찍어야 하니 정 전도사를 찾아가라"고 지시했다. 정씨는 자신을 찾아온 여성과 다시 성관계를 가졌다.
이후 정씨는 다시 이상훈의 직장 동료인 '장 대리'로 변신해 "이상훈에게 보낸 나체사진과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하겠다"며 전화로 여성을 협박했다. "정 전도사와 성관계한 동영상을 보내라" "가슴과 성기가 드러난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요구했다. 여성이 거부하자 "자녀가 다니는 학교·유치원, 여성의 직장·교회, 남편에게 나체사진과 동영상을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협박이 두려웠던 여성은 정 전도사의 집, 인근 공원, 모텔 등에서 수십 차례 정 전도사와 성관계를 하거나 알몸 사진·동영상을 찍었다. '장 대리'의 요구는 점점 대담해져 낯선 남성들과 4차례에 걸쳐 모텔에서 그룹 성관계를 하도록 했다. 정씨는 사전에 이 여성의 사진과 동영상을 불법 성인사이트에 올려 "섹파(섹스파트너) 공유합니다. 남자 3~4분과 함께 '돌림빵' 하실 분들 계시면 바로 보내 드립니다" 등의 글을 수차례 썼다. 이 여성이 성관계를 맺은 낯선 남성들은 이 사이트에서 모집한 이들이었다.
'이상훈' '서 부장' '장 대리'에겐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매번 발신 번호를 숨긴 채 전화로 연락했고, 항상 "정 전도사를 찾아가라"고 했다. 정씨는 찾아온 여성에게 "나와 성관계를 하는 것으로 장 대리에게서 당신을 보호해주겠다"고 말했다. 정 전도사에게 고마움을 느낀 여성은 협박당할 때마다 정 전도사에게 도움을 구했다.
2011년 8월 이 여성은 사실을 안 친정어머니의 권유로 경찰에 '장 대리'를 신고했다. 경찰이 '장 대리'의 발신 번호와 이메일 등을 추적해보니, '이상훈' '서 부장' '정 전도사'는 모두 동일 인물이었다. 피해 여성은 경찰 조사에서 "이상훈, 장 대리, 정 전도사를 모두 다른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며 "정 전도사가 범인인지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범죄심리전문가인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는 "누구에게나 통하는 수법은 아니지만 정에 굶주렸거나 외로움을 타는 등 심리적 약점이 있는 사람은 작은 호의에도 상대방을 강하게 신뢰하게 된다"며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범죄이기 때문에 오히려 지능지수가 보통 이상인 사람이 쉽게 말려들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