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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대박 난다면 그건 대통령님 덕분입니다Sweet Day/삶의 향기 2013. 12. 22. 08:29반응형
이 영화 대박 난다면 그건 대통령님 덕분입니다
출처 오마이뉴스 입력 2013.12.21 13:07
[오마이뉴스 최한욱 기자]
단언컨대 < 변호인 > 은 올해 최고의 영화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심지어 그녀의 측근조차도) '안녕'하지 못한 불안녕의 시대에 이보다 더 절박한 영화는 없었기 때문이다. < 변호인 > 은 반드시 나와야 했고 또 나올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예술은 시대의 산물이며 걸작은 시대의 격랑 속에서 잉태되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은 < 레 미제라블 > 을 썼고 러시아혁명은 < 전함 포템킨 > 을 만들었다.
물론 < 변호인 > 은 < 레 미제라블 > 이나 < 전함 포템킨 > 과 비교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다소 개념 있는 상업영화라고 할 수 있다. < 변호인 > 의 예술적 가치를 논하는 것은 낯뜨거운 짓이다. 어쩌면 시류에 편승한 영악한 상업주의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 변호인 > 은 감히 역사적인 작품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제작진들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시대의 부름에 곧바로 응답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 변호인 > 은 12월18일 개봉했다 ⓒ NEW
그런 면에서 < 변호인 > 을 올해 최고의 영화로 꼽는 것은 당연하다. 올해 유독 시대와 소통하려는 영화들이 많았지만 < 변호인 > 만큼 시대의 부름에 솔직하게 응답한 영화는 없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관람할 기회를 놓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두 말이 필요 없다. 닥치고 봐야 한다. < 변호인 > 은 단지 감상하는 영화가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참여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는 언제든지 볼 수 있지만 역사의 한 장면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에 참여하는 것은 언제나 있는 기회가 아니다.
특히 '일베'에 심취한 젊은이들은 꼭 한 번 보기 바란다. 당신들을 계도하거나 설득하려는 게 아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는 당신들을 설득할 수 없다고 믿는다. 당신들은 이미 너무 많이 나가 버렸다. 다만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았으면 한다. 자신의 죄도 모르고 죄를 저지르는 것보다 서글픈 일은 없다.
< 변호인 > 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
▲송우석은 고졸 출신의 속물변호사이다 ⓒ NEW
영화는 '허구'라는 친절한 자막과 함께 시작한다. 그럼 영화가 허구지 사실인가? 극영화건 기록영화건 모든 영화는 허구다. 실재사건과 실존인물을 다룬다고 해도 영화는 허구다. 그럼에도 제작진은 과잉친절로 관객을 모독(?)한다. 두렵기 때문이다. 단지 '별점 테러'(개봉 직전까지 포털 사이트에서 < 변호인 > 의 평점은 무려 5점대였다) 때문이 아니다. 이미 충무로는 자기검열의 시대를 살고 있다.
< 변호인 > 은 '그분'의 젊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이고 세칭 '부림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설령 모를지라도 30분만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야기의 전개도, 결말도 모두가 알고 있다. 그 속물 변호사가 앞으로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사실까지 이미 알고 있다. 영화적으로도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카메라는 우직할 정도도 묵묵하게 평범한 소시민의 정치적 각성 과정을 재연하는데 자신의 역할을 철저히 제한한다. 미련할 정도로 영화적 기교는 무시된다.
하지만 < 변호인 > 은 그 어느 영화보다도 울림이 크다. 뻔한 이야기, 다 아는 인물 그래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영화지만 그 틀에 박힌 상투성이 오히려 관객의 심장을 쥐어짠다. 이런 류의 영화에 꼭 나올 것만 같았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라는 민망한 대사가 나오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단단히 마음먹고 대비를 해도 마찬가지다. 뻔히 알면서도 속절없이 당한다.
왜일까? < 변호인 > 은 30년 전, 이제는 역사가 되어 버린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변호인 > 의 상투성은 오히려 관객들에게 더 큰 충격을 준다. 30년 전의 과거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끔찍한 현실과 직면할 때 상투성은 마법과 같은 사실성으로 반전된다. 마치 < 식스 센스 > 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과도 흡사하다. 유령은 다름 아닌 관객 자신이다.
의도했는지 아니면 예술적 기량의 한계인지는 모르겠지만 < 변호인 > 의 우직한 정공법은 의외의 결과를 가져 왔다. 화장 끼 전혀 없는 맨 얼굴의 투박한 역사재연극은 영화보다 더 기괴한 현재와 교접되어 시공간을 초월하는 기묘한 사실주의로 전화된다. < 변호인 > 이 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일 1, 2년 전에 개봉했다면 < 변호인 > 은, 물론 영화의 완성도를 고려할 때 일정 수준의 흥행은 예상되지만, 이 정도의 파괴적인 대중적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송강호(송우석 역)의 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그는 언제나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지만 이번만큼은 확실히 다르다. 송강호는 < 설국열차 > , < 관상 > 에 이어 올 한 해에만 3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 변호인 > 의 송강호는 또 다르다. 송강호는 '그분'을 연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호인이 되어 시대와 맞서 싸웠다. 그는 시간 여행자가 되어 역사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역사가 되었다. 송강호에 의해 < 변호인 > 은 더 이상 '그분'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송우석 혹은 송강호라는 속물 변호사의 이야기가 되었다.
송강호뿐만 아니다. < 변호인 > 의 모든 배우들이 가공할 연기력을 뿜어낸다. 모든 연기자들이 시대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을 활활 불사른다. 그들은 연기자가 아니라 불의와 맞서 싸우는 전사들이었다. 특히 곽도원(차동영 역)은 가장 뛰어난 전사였다. 그는 반공주의적 신념으로 똘똘 뭉친 고문기술자를 소름끼치게 재창조했다. 특히 송강호와 곽도원의 법정대결은 근래 보기 드문 압도적인 명장면이다. 충무로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의 그 어떤 법정영화도 이런 숨막히는 긴장감을 뽑아내지는 못했다.
김영애(최순애 역)의 연기는 노장의 힘을 느끼게 한다. 김영애는 아주 짧은 분량으로 평범한 어머니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탁월하게 형상했다. 오달수(박동원 역), 송영창(판사 역), 정원중(김상필 역), 이성민(이윤택 역) 등 모든 출연자들이 조·단역을 가리지 않고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임시완(진우 역)의 연기도 주목할 만하다. 88년 생 미소년 아이돌 배우는 자신의 경력에 대재앙이 될지도 모르는 작품에 용감하게 뛰어들어 탁월한 생존능력을 보여준다.
▲88년 생 미소년 아이돌 배우는 자신의 경력에 대재앙이 될지도 모르는 작품에 용감하게 뛰어들어 탁월한 생존능력을 보여준다. ⓒ NEW
'그분'이 우리 곁을 떠나고 벌써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난 5년 동안 대한민국은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그 악몽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 4년 동안 지속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그분'이 살아 있다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고인의 생전에 그들이 한 짓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더 끔찍한 상황을 경험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 변호인 > 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이다. 단지 국가보안법사건이라는 공통점 때문은 아니다. 30년 전 진우가 겪었던 잔혹한 일들이 지금도 더 교묘하고 악랄하게 재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죄형법정주의, 무죄추정원칙 등 근대법의 근본원칙들은 야만적인 국가폭력에 맞선 양심적인 변호인들의 유일한 법률적 무기였다. 하지만 그 무기들은 신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모두 폐기처분되어 버렸다. 차동영과 같은 노련한 고문 기술자들은 이제 사라졌지만 어떤 면에서 그보다 더 끔찍한 사회적 고문이 공공연하게 자행됐다. 미디어는 21세기의 차동영이었다. 미디어에 의해 이석기는 재판정에 설 기회조차 사실상 박탈 당했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의 모든 혐의는 입증됐다. 그의 기본권은 철저히 짓밟혔다.
이석기는 종북주의자일까? 모른다. 이석기는 내란을 모의했을까? 모른다. RO는 존재할까? 모른다. 최소한 법정에서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것이 근대법의 기본정신이며 원칙이다.
하지만 합리적인 법률가들조차 광란적인 신매카시즘의 칼바람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진보연하는 호사가들은 겁에 질려 "만일 사실이라면"이라는 희대의 유행어를 남겼다. 만일 사실이 아니라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미디어는 21세기의 차동영이었다 ⓒ NEW
'양심수후원회'에 따르면 2013년 12월 현재 양심수는 총 44명이다. 그들은 차동영의 고문만큼 잔인한 사회적 편견과 무관심 속에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다. 이제 그 누구도 그들의 인권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어느 때보다도 양심수는 급증하고 있지만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과 같은 행사는 더이상 열리지 않는다. 우리가 '안녕'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박근혜 대통령 때문이 아니다.
30년 전 88올림픽에 요트선수로 참가하고 싶었던 순진한 고졸 속물변호사는 단지 상식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맨 몸으로 거대한 국가폭력과 맞서 싸웠다.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만큼 무모한 짓이었다. 그리고 그는 처참하게 패배했다. 단지 좋은 책을 읽고 싶었던 진우는 아무런 죄도 없이 3년 동안 '차디찬 감옥'에서 청춘을 짓밟혔다.
하지만 그 계란은 1987년 마침내 병아리가 되어 힘차게 날아 올랐다. 다시 15년이 흐른 뒤 그 속물변호사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비록 견고한 야만의 바위를 완전히 깨부수지는 못 했지만 적어도 작은 균열은 냈다. 그 '바보'같은 무모함이 세상을 조금은 나아지게 했다. 그의 도전은 비극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가 추락한 바로 그 지점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고인이 살아있다면 과연 이석기를 변호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실패한 대통령'일지는 모르지만 양심적인 변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승리했을까? 아마도 또다시 처참하게 패배했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매카시즘과 국가보안법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좌절했을까? 아니다.
또 다시 계란이 되어 바위로 돌진했을 것이다. '절대 포기하지 말자'는 그의 좌우명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스스로 계란이 되어 바위로 돌진하는 바보의 뚝심이다. 그리고 그 '바보정신'은 고인이 우리에게 남겨 준 가장 값진 유산이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안녕'하지 못한 지금, 속물이었지만 그래도 정의로웠던 그 '바보'가 더욱 그리워진다.'Sweet Day > 삶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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