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국가에서 법률은 모든 국가작용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법률의 제·개정 및 폐지는 국회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권한이다. 19대 국회의원들이 지난 1년 동안 발의한 법안 4622건 중 295건만 가결됐다. 철회·폐기된 것을 제외한 나머지 3869건 중 상당수도 충분한 논의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이들 중에서 "제법이네"라는 말이 나올 만큼, 실생활 속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거나 사회의 불합리한 부분을 바로잡는 '제대로 된' 법안들을 찾아내서 생생한 현장과 인터뷰를 통해 소개한다. <편집자말>
▲ 31일, 여의도 CGV 매점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다. |
ⓒ 유정아 |
지난 일요일, 대형 영화관을 방문한 A씨는 오후 1시 10분에 시작되는 영화를 보기 위해 헐레벌떡 영화관으로 뛰어들어갔다. 10분에 맞춰 아슬아슬하게 당도한 A씨의 눈앞에 펼쳐진 건 A씨가 보려던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었다. 비싼 카메라를 사면 덤으로 사은품을 준다는 '광고'였다. 그 뒤에도 꽃미남 남자배우가 마른 목선을 드러내며 시원하게 음료수를 마시는 광고, 사진에 소리도 담을 수 있다는 휴대폰 광고가 이어졌다. 10분에 시작한다던 영화는 20분을 훌쩍 넘겨서야 막이 올랐다.
영화를 보려고 만 원을 낸 A씨는 10여 분의 광고까지 돈을 내고 본 셈이다.
이 같은 상황은 A씨만의 특별한 얘기가 아니다. 대형 영화관을 찾은 관람객 대부분은 표에 적힌 영화 시작 시간 후에도 10여 분간의 광고를 봐야만 영화를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높다.
지난달 31일 오전 여의도 CGV에서 만난 관객들은 "10분, 20분씩 광고가 상영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아이들과 함께 영화관을 찾은 김나영(37)씨는 "같은 광고를 연달아 몇 번씩 내보내는 게 짜증 난다, 광고는 티켓에 적힌 영화 시작 시간 전에 하는 게 맞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백정순(38)씨 역시 "광고가 길다는 걸 아니까 아예 늦게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영화를 시작하고도 계속 관객들이 들어온다"고 지적했다.
문화관광부 홈페이지에 민원을 접수할 수 있는 '국민신문고'에도 광고로 인해 영화 상영시작 시간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데 대한 항의 글이 올라오고 있다.
"영화 시작한다고 표에 나와 있는 시간 이후 거의 10분 정도 광고를 보여주더군요. 영화표 시간 수정 조치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2013년 7월 15일)
"티켓에 인쇄된 영화 시작 시간이 10분이나 훌쩍 지나갔는데도 10번째 광고만 지나간 경우도 많습니다. 영화관은 광고 수입을 가져가겠지만 소비자는 개인의 시간을 뺏기게 됩니다."(2013월 5월 2일)
이에 대해 문화관광부 영상콘텐츠산업과는 "영화 상영 전 과다 상업 광고 자제 및 상영 시작 시간 준수협조를 CJ 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 등 개별 극장에 요청했다"며 "광고 시간 표시와 관련, 상영관들은 입장권 하단이나 극장 내 특정 공간에 광고 시간을 알리는 안내문을 게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불만을 접수해 대대적인 실태조사를 벌인 문광부가 대형 영화관에 자제 요청을 했고, 영화관은 영화표 하단에 광고 시간을 알리는 안내문을 넣었다는 것.
'당연히' 10분 늦게 시작하는 영화, '사전 고지'했다지만...
▲ 하단에 '입장 지연에 따른 관람 불편을 최소화하고자 본 영화는 10여 분 후 시작됩니다'라고 적혀 있는 영화 티켓. |
ⓒ 유정아 |
티켓 맨 아래에 적힌 '10분 후 영화 시작' 문구를 사전에 인지한 관객도 많지 않다. 여의도 CGV에서 만난 관객들은 입을 모아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백씨는 "그런 문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며 "시간이나 좌석만 확인하니 실제로 있는지 지금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김씨도 "하단에 써 놓으면 관객들이 볼일이 없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규제의 실효성이 떨어지는 상황임에도 영상콘텐츠산업과 측은 "극장 운영은 사적 영역이므로 제도적으로 강제하는데 한계가 있다"며 추가적 제재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에 국회 차원에서 '법적 규제' 움직임이 일고 있다. 노웅래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하 영비법)이 그것이다. 법안은, 영화 시작 시간을 명확히 명시하고 시작 시간 이후 광고 상영을 금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노 의원은 "영화 상영시간 중 상업 광고 등을 과다하게 상영하여 관람객들에게 불쾌감과 불편을 주고 있다"며 "영화시간에 대한 명백한 규정이 미비하여 영화 상영관 경영자 등이 계속해서 광고 횟수 및 광고 시간을 늘려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영화 상영시간을 법률에 명확히 규정하고 영화 상영시간에는 광고 상영을 제한하도록 하여 관람객의 영화 감상권을 보장하겠다"며 법안 취지를 설명했다.
즉 영비법 41조에 명시된 '영화 제목·상영 기간'을 신고해야 하는 항목에 '상영시간'을 추가해, 영화 상영시간을 공지하고 준수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영화 시작 시간 허위 기재'를 막겠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 같은 규정을 어길 시, 3개월 이내의 영업정지를 처하게끔 법에 명시했다.
해당 개정안은 지난해 6월 발의됐으나, '방송 공정성' 문제로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현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가 파행을 거듭해 법안에 대한 논의가 진척되지 못했다. 법안심사 소위가 한 차례도 열리지 못한 상황. 이후 지난 6월 임시국회 때 처음 법안 관련 논의에 돌입한 단계다.
문화관광부 "정부가 시장 영역 개입, 바람직하지 않아"
정부는 법적 규제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다. 문화관광부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영화 시간은 하루 전이라도 변경 가능한 부분인데 일률적으로 규제하는 건 정부가 시장 영역에 너무 깊게 개입하는 것"이라며 "법이 만들어진다면 문광부는 이를 규제해야겠지만 기본적으로 법으로까지 규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 입장"이라고 밝혔다. 그는 "개인의 불편을 법으로 규제하는 건 영업 자유를 침해하는 건 아니냐는 의견도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CJ CGV는 영비법이 발의된 직후 노 의원에게 '건의문'을 보내 "영비법 개정안은 실질적 광고 금지와 동일한 효과를 가지며, 극장 산업의 수익 하락으로 직결돼 영화 산업의 기반을 붕괴시킬 수 있다"며 "고용효과에도 악영향을 초래하는 과도한 규제"라고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 영화관 측은 "광고 상영 금지로 인한 수입 손실을 영화 관람료 인상을 통해 보전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노 의원 측에 밝히기도 했다.
'영화 산업이 붕괴 될 수 있다'는 근거로는 광고 매출에 의존하는 영업수익 구조를 들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1년 기준 멀티 플랙스 B사의 영업 수익 구조를 보면, 광고 이익이 전체 매출의 87%에 해당 한다. 영화 상영으로 얻는 수익은 -49.9%에 달하고, 매점을 통해 얻는 수익은 48.9%로 조사됐다. 2010년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 상영에 -29.5%의 손해를 본 영화사는 매점 수익 (36.7%)과 광고 수익(76.3%)으로 손해분을 메우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전체 '매출액' 규모로 보면 티켓 판매 금액 규모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대형 영화관 가운데 유일한 상장 기업인 CG CGV의 사업보고서(2013년 4월 공시)에 따르면 2012년도 매출액의 66.3%(4407억 5100만 원)에 해당하는 부분이 티켓 판매 금액이다. 매점판매는 전체의 17.2%(1143억 1200만 원)이고 광고 판매의 경우 10.5%(696억 6600만 원)에 그쳤다.
결국 '매출' 측면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티켓 판매는 아무리 성과를 올려도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막대한 제작비와 출연료로 '영화 한 편'에 대한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이를 상영하는 영화관도 어마어마한 지출을 감수해야 만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영화관에서 팔아야 할 핵심 물품인 '영화 이켓'에서는 수익을 얻지 못하고 곁가지인 광고와 매점에서 수익을 얻는 기형적 형태다.
매점에서 얻는 수익과 광고로 얻는 수익을 통해 영화를 팔아도 적자를 보는 대형 영화관들은 흑자를 내고 있다. 실제 CGV는 지난해 매출액이 전년 대비 21.3%, 당기순이익은 전년대비 88.4%나 증가했다.
노 의원은 "그들이 만든 영화 유통 구조로 인해 티켓 판매를 해도 수익을 얻을 수 없는 거라면 경영 합리화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그건 그대로 두고 '허위 기재'로 이득을 보는 걸 금지하려 하니 '표 값을 올릴 수밖에 없다'는 건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대기업이 영화 '투자·제작-배급-상영'에 모두 진출해, 비정상적인 영화 업계를 만드는데 일조해 왔다는 것이다.
노 의원은 '영비법 개정안은 실질적 광고 금지 법안'이라는 영화관 측 입장에 대해서도 "상영시간으로 명시된 시간 전에 나오는 광고를 전부 막는 게 아니라 시작 시간을 '허위 기재'하는 것을 금지하겠다는 것"이라며 "영화관의 이 같은 논리는 불법을 인정하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더군다나 올해 들어 CJ CGV, 메가박스에 이어 롯데시네마도 주말 영화관람료를 만 원으로 인상해 관람객들의 불만에 기름을 붓고 있다. 대형 영화관들이 줄지어 관람료를 올렸지만 광고 수는 크게 변동이 없는 상황이다.
이날 영화 시작 시간 후 10분이 넘는 광고를 봐야 했다는 김 아무개(30)씨는 "유명한 영화일수록 광고가 더 많이 붙던데, 그에 따른 수익은 다 챙기면서 입장료는 입장료대로 올린다니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백씨는 "영화관은 기본적으로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고, 광고는 거기에 딸려오는 부수익인데 관객은 배려하지 않고 수익만 계산하는 거 같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