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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장님의 ‘못된 손’ 이러시면 안됩니다
    Sweet Day/삶의 향기 2013. 6. 15.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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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甲의 폭력’] 부장님의 ‘못된 손’ 이러시면 안됩니다~



    “퇴근하고 술이나 한잔 하자”는 말이 S부장 입에서 나왔을 때 내게도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비공식적으로 그는 회사 여직원 사이에서 유명했다. S부장은 왜 자꾸 여직원을 따로 불러내 술을 마시는 걸까. 부서장으로서 부하 직원의 고충을 경청하고 격려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무적 이유를 댈지 몰라도 정작 술상에서 하소연을 듣는 건 나였다.

    못된 손

    “정숙아, 내가 요즘 외롭다. 마누라랑 애들은 내가 집에 가도 장롱이나 식탁 보듯 하고. 마음 붙일 데가 없어. … 너희는 나한테 부장님, 부장님 하는데 난 너희를 보면 나이차를 못 느끼겠어. 그냥 귀여운 동생 같고. 편하게 오빠라고 부르면 안 되겠냐.” 업무 이야기는 회식자리에서 도망친 얄미운 동료처럼 슬그머니 사라지고 몸 둘 바를 모를 사생활 얘기만 돌고 돌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이 사람이 나랑 연애라도 하고 싶다는 건지. 직장 내 성희롱 사례에 18번처럼 등장하는 “우리 모텔 가자”는 상사의 말이 이러다 나오는 건가 싶어 조마조마했다. 차마 물어볼 수도 없는 생각이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미는데 누가 들으면 나 혼자 오버한다고 할지 몰라도 이 상황에는 분명히 지울 수 없는 인상이 있었다. 그리고 S부장은 자꾸 내 손을 잡았다.

    이 손을 빼야 하나 말아야 하나. 홱 빼자니 “왜 이러느냐”며 대놓고 무안 주는 것 같고, 그대로 두자니 “내 손 잡아도 돼요”라며 허락하는 것 같고. 그래서 한 몇 초 있다가 슬쩍 빼면 다시 몇 초 있다가 S부장의 손이 덮쳐온다. 두꺼운 손아귀에 잡힌 내 손이 올가미를 뒤집어쓴 짐승처럼 바동거리면 그는 능청맞게 묻는다. “넌 부장이 싫으냐?” ‘오빠, 동생’ 하자던 그가 자신을 ‘나’라고 안 하고 ‘부장’이라고 하다니 손잡는 일을 “이건 일적인 거야”라고 우기는 듯했다. 어쨌든 S부장은 연신 웃는 얼굴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은 나쁜 짓 할 땐 반드시 웃으라는 조언이었던가.

    음담패설

    이놈의 부서 회식은 왜 이리도 자주 돌아오는지. 부어라 마셔라 하는 자리에서 S부장은 어김없이 야한 농담을 툭툭 내뱉는다. 어느 직원이 돼지고기 주물럭을 주문하면 S부장은 음흉하게 “주물럭은 그게 아니라 이거지”라며 직원 몸을 주물럭거리는 식이다. 상사가 되면 어디 가서 가지각색의 음담패설에 대해 교육이라도 받는 걸까. 청산유수가 따로 없다.

    S부장을 호위하듯 좌우로 둘러앉은 남자 직원들은 어떤가. 한쪽 입꼬리를 쓰윽 걷어 올린 채 그 히죽거리는 입으로 술잔을 홀짝인다. 야한 농담이 무슨 안주거리나 되는 양. 아니, 야한 농담에 홍당무 얼굴이 된 여직원을 안주거리로 생각하는 건가. “이봐, 내 얼굴이 빨간 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무지 황당해서라고!” 이렇게 퍼붓고 싶은 걸 나는 참아야 한다. 갓 시집온 며느리가 느닷없이 제사상을 뒤엎어버리는 수준의 테러가 될 테니까.

    회식 때마다 나를 뺀 모든 사람이 미리 모의라도 한 듯한 음담패설을 화제로 똘똘 뭉쳤다. 이런 상황이 비열하게 느껴져 얼마 전부턴 짓궂은 말에 웃지도, 움츠리지도 않는다. 이러면 재미없어 다음부턴 안 하겠거니 한 건데 웬걸, 이런 나에 대한 S부장의 반응은 어찌 이리 뻔뻔한가. “야, 정숙아. 넌 이 자리가 재미없냐.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얼굴 좀 펴라. 입사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생글생글한 맛이 없어.” 지금 안 웃는 건 나 말고도 김 대리, 이 대리, 박 대리 등등이 더 있는데 왜 S부장의 눈은 컴퍼스 중심축처럼 나한테만 꽉 박혀서 안 움직이는 걸까.

    S부장의 안하무인을 나는 받아치지도 못하면서 자리를 피할 수도 없었다. 사람은 제일 모면하고 싶은 순간에 정작 자리를 뜨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면 지는 거니까. 그리고 내 뒤통수 너머에서 나머지가 나를 요리조리 씹어댈 걸 상상하면 너무 비참하니까.

    철면피들

    다른 회사에서 벌어진 성희롱 사건들이 내 귀에도 들려왔다. 서울 남대문의 Y사에선 여자가 태반인 신입직원들을 차장급 간부가 이태원의 트랜스젠더 바에 데려갔단다. 여자로 성전환 수술을 한 남자들이 알몸으로 춤추는 곳에서 회식을 한 거라는데. 사내에서 문제가 되자 정작 그 간부는 부하 직원들에게 “누가 찔렀냐”며 화를 냈단다. 적반하장은 성추행범의 공통점인가 보다.

    우리 옆 M사에선 간부가 회식 자리에서 여직원 허벅지를 상습적으로 만졌다. 과장급 남자 선배는 여직원이 털어놓은 고민을 듣고도 묵살했다는데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 회사는 여자 선배조차 “정숙씨, 실장님 술잔이 비었으면 알아서 착착 따라야지. 이런 건 한 살이라도 젊은 여자 후배가 하는 거야”라고 하는 정도다. 아무튼 이 험한 세상에도 눈곱만큼의 정의는 살아 있는지 여직원 허벅지를 만진 간부는 결국 잘렸다고 한다.

    고용노동부에서 만들었다는 ‘직장 내 성희롱’ 예방 책자엔 성희롱 피해자가 안 되려면 첫째로 의사표현을 확실히 하라고 돼 있다. 이거 만든 사람은 분명 남자거나 회사 안 다니는 사람일 거다. 매일 부딪혀야 하는 직장 상사한테 어떻게 거부 의사를 ‘확실히’ 밝히나. “S부장님, 저 자꾸 불러내지 마세요. 손도 잡지 마시고요. 불쾌하거든요.” 이렇게 말한 다음은 어쩌라는 건지 예방 책자엔 일언반구도 없다. 무책임한 책자 같으니. 다른 예방법도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다. 사규에 성희롱 관련 규정이 있는지 확인해라. 회사에 예방대책 마련을 촉구해라. 성희롱 중단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라.

    전면전

    S부장이 어느 날 나한테 무서운 얼굴로 물었다. “너 요즘 내 얘기 하고 다니냐?” 쇠망치로 정수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나는 S부장의 언행을 몇몇 동료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S부장은 어정쩡하게 긍정도 부정도 못하는 나를 노려봤다. 내 심장은 가슴팍을 두들겨 패듯 뛰었다. S부장은 한마디로 충분히 겁을 줬다고 생각했을까.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돌아갔다. 나는 회사에 정식으로 문제제기를 했다. 물론 망설였다. S부장에게 전면전을 선포하는 셈이었으니까. 승산이 있을까. 그가 보복하지 않을까. 회사 생활이 꼬이진 않을까. 하지만 이런 걱정보다도 공포스러운 건 이대로 매일매일 그를 마주치는 것이었다. S부장과 나의 전쟁이 알려졌을 때 간부들은 그를 두둔하거나 눈을 감았다. “S부장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일을 그렇게 뚝심 있게 잘하는 친구가.” 일을 잘하는 거랑 성추행을 안 하는 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S부장은 무고함을 주장했다. 부하 직원을 격려한 게 이렇게 화살이 돼서 돌아올 줄 몰랐다며 억울해했다. 내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식으로. 심지어 불경기에 회사 사정도 안 좋은데 철없는 여직원 한 명의 일방적 주장에 노사가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해서야 되겠느냐는 논리까지 폈다. 애사심에 감동한 건지 회사 고위 간부로 구성된 인사위원회는 그를 징계하지 않았다.

    인사 발령이 나면서 나는 S부장과 다른 부서에서 일하게 됐지만 사표를 썼다. 수치심과 무기력감으로 범벅이 된 채로는 멀쩡하게 회사생활을 할 수 없었다. 회사에선 우연히 지나가는 S부장의 뒷모습만 봐도 가슴이 뛰고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나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죄인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고 있을 때 S부장이 승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근에는 또 다른 여직원한테 찝쩍거린다는 얘기와 함께. 아! 정말, 변태 없는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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